인플레이션은 왜 화폐를 망가뜨리는가: 돈이 돈답지 않을 때
물가는 오르는데 왜 돈은 점점 믿을 수 없게 될까?
화폐는 신뢰다, 단지 종이가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화폐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다. 한 장의 지폐에 담긴 숫자는 물건을 사고, 거래를 가능하게 하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는 ‘사회적 약속’이자 신뢰의 상징이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이 약속은 조금씩 무너진다. 화폐는 본질적으로 세 가지 기능을 가진다. 가치 저장, 교환 수단, 회계 단위다. 인플레이션은 이 세 가지를 동시에 공격하며, 화폐를 제 기능 못 하게 만든다.
붕어빵 다섯 개가 한 개로… 예전 가격은 어디로 갔을까?
어릴 적 500원이면 붕어빵 다섯 개를 샀다. 지금은 그 돈으로 한 개도 사기 어렵다. 이게 인플레이션이다. 겉으로 보기엔 단지 가격이 오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돈의 ‘구매력’이 줄어든 것이다. 즉, 같은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돈을 더 이상 안전하게 모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늘 돈은 내일 더 쓸모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축이 바보 짓이 되는 세상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 은행에 돈을 넣어두는 사람은 손해를 본다. 예를 들어 1년 전 200만 원으로 살 수 있었던 노트북이 지금은 250만 원이 되었다고 해보자. 이 말은 당신의 200만 원이 사실상 50만 원어치의 구매력을 잃었다는 뜻이다. 저축은 더 이상 ‘미래의 대비’가 아니라 ‘가치 손실’이 된다. 사람들은 돈을 보관하기보다 소비하거나, 실물자산에 투자하려 한다. 이때부터 화폐의 가치 저장 기능은 사실상 붕괴한다.
가격이 오르면 사고파는 것도 불안해진다
화폐가 교환 수단으로서 작동하려면, 가격이 일정해야 한다. 그런데 물가가 자꾸 오르면 가격은 매일 바뀐다. 상인은 오늘 팔 가격을 정하기 어렵고, 소비자는 지금 사는 게 나은지 계속 망설이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는 거래 자체가 줄어든다. 사람들이 화폐를 신뢰하지 않으면, 시장도 돌아가지 않는다. 결국 화폐의 두 번째 기능, 교환 수단 역할도 약해진다. 이 상태가 오래가면 상거래는 불안정해지고, 시장은 위축된다.
회계 단위로서의 돈도 무력화된다
우리는 돈으로 가치를 계산한다. 커피는 3천 원, 밥값은 9천 원, 월급은 300만 원이다. 그런데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지면, 이 숫자들이 의미를 잃는다. 예를 들어 한 달 전에는 커피가 3천 원이었는데, 지금은 4천 원이라면? 이 숫자들은 비교 기준이 되지 못한다. 돈이 회계 단위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가격이 기준이 아니라 변동성의 상징이 될 때, 사람들은 숫자를 믿지 않게 된다.
짐바브웨와 베네수엘라, 돈의 몰락을 보여주다
짐바브웨에서는 100조 짐바브웨 달러로 사탕 하나 사기 어려웠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점심값을 내기 위해 돈을 자루에 담고 다녀야 했다. 인플레이션이 극단에 이르면 사람들은 화폐 대신 달러, 금, 기름, 쌀, 심지어 담배로 거래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국가가 발행한 돈이 더 이상 ‘돈’으로서 기능하지 못한다는 충격적인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먼 나라 이야기만이 아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한국의 화폐도 같은 길을 갈 수 있다.
결국 돈의 가치는 ‘신뢰’라는 보이지 않는 기둥 위에 서 있다
돈의 힘은 그 종이 자체에 있지 않다. 우리가 그 숫자를 믿는 마음, 그것이 진짜 자산이다. 그래서 중앙은행은 금리를 조절하고 통화량을 관리한다. 이것은 단지 물가를 잡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국민에게 ‘돈을 믿어도 된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정책이다. 인플레이션은 그 메시지를 지우는 침묵의 공격이다. 돈이 돈다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라,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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